칼럼 · 관여도
헬리콥터를 넘어,
이제는 군대와 직장까지
관여의 적정선은 어디인가
한국에서 한때 '헬리콥터 맘'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자녀의 모든 문제와 결정에 직접 나서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또한 요즘은 학교를 넘어 군대와 직장에도 부모님이 직접 아이를 대신해 항의를 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합니다.
자녀에게 무관심은 좋지 않지만, 너무 관여하는 것 또한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적재적소의 간섭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말이 계속 바뀌어 왔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현상을 부르는 이름이 계속 새로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기존 단어로는 다 담기지 않을 만큼 개입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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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헬리콥터 부모
아이 머리 위를 맴돌며 모든 문제에 내려앉는다. 학교에 전화를 걸고, 숙제를 대신 챙기고, 친구 관계에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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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잔디깎이 부모
문제가 생긴 뒤에 나서는 게 아니라, 아이가 걸을 길의 장애물을 미리 밀어낸다. 아이는 그런 장애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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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커튼콜 부모
아이가 성인이 된 뒤에도 무대 뒤에서 따라간다. 군대 지휘관에게 항의하고, 자녀의 회사에 전화를 걸어 처우를 따진다.
헬리콥터에서 잔디깎이로 넘어갈 때 결정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개입의 시점이 사후에서 사전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문제가 터진 뒤에 수습하는 것과,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치우는 것은 겉보기에 둘 다 사랑이지만 아이가 배우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앞엣것에서 아이는 최소한 문제가 있었다는 걸 압니다. 뒤엣것에서는 세상이 원래 평탄한 줄 압니다.
왜 늘어났을까
부모가 예전보다 극성이라서가 아닙니다. 조건이 달라졌습니다. 자녀 수가 줄면서 한 아이에게 쏟을 수 있는 자원이 늘었고, 경쟁이 심해지면서 실패의 비용이 커 보이게 됐습니다. 아이 하나가 한 번 미끄러지면 만회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감각이 개입을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과잉 관여는 대개 욕심이 아니라 불안에서 나옵니다. 이걸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원인이 욕심이면 참으면 되지만, 불안이면 참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여가 독이 되는 정확한 지점
과잉 관여의 문제는 아이가 편해진다는 게 아닙니다. 아이가 실패해본 적 없는 상태로 사회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회복탄력성은 설명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스스로 일어나 보고, 그게 되더라는 경험이 쌓여야 만들어집니다. 부모가 넘어질 자리를 전부 치워버리면 아이는 그 경험을 할 기회 자체를 잃습니다. 그리고 처음 넘어지는 순간이 스무 살 이후로 미뤄집니다. 그때의 넘어짐은 훨씬 아프고, 곁에 부모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반대편이 안전한 것도 아닙니다
한쪽만 지적하면 글이 얕아집니다. 관여가 부족한 쪽도 똑같이 위험합니다.
아이에게 전부 맡기는 것은 자율이 아니라 방임이 되기 쉽습니다. 자율은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결정을 맡기는 것이고, 방임은 감당할 수 없는 크기까지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열 살 아이에게 취침 시간을 맡기는 것과 진로를 맡기는 것은 다릅니다. 후자는 자유를 준 게 아니라 무게를 떠넘긴 것입니다.
부모 유형 검사가 관여도를 높음·낮음이 아니라 축의 위치로 보는 이유입니다. 높은 쪽 끝과 낮은 쪽 끝에 각각 다른 함정이 있습니다.
적정선을 찾는 세 가지 질문
"적재적소"를 실제로 판단하려면 기준이 필요합니다. 개입할지 말지 망설여질 때 이 세 개를 순서대로 물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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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릴 수 있는 일인가
되돌릴 수 있으면 아이에게 맡깁니다. 준비물을 안 챙겨 가서 혼나는 건 되돌릴 수 있습니다. 안전이나 건강이 걸린 일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 선만 지켜도 개입의 절반이 정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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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도움을 요청했는가
요청이 없는데 나서고 있다면, 그 개입은 아이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불안해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질문은 아이가 아니라 나를 점검하는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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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신하면 아이가 다음엔 할 수 있게 되는가
같이 해보면서 방법을 알려주는 것과, 그냥 대신 해치우는 것을 가르는 질문입니다. 대신해준 일은 다음에도 대신해야 합니다. 열 번 대신해주면 열한 번째도 부모 차례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이 통하지 않은 날이 있었습니다
아이가 친구들과 놀 때 친구들 머리를 톡톡 때렸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정도면 아이들끼리 화도 내고 사과도 하고 풀 수 있을 줄 알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맞았던 아이 부모님들은 왜 그런 제 아이를 제지하지 않냐고 나무란 적이 있습니다.
위의 세 질문을 그날에 대보면 저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되돌릴 수 있는 일이었고, 아이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제가 나서면 아이들은 스스로 푸는 법을 못 배웠을 겁니다. 기준대로 판단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세 질문은 전부 내 아이가 무엇을 배우는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자리에는 제 아이만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다른 아이가 맞고 있었습니다. 내 아이의 성장을 위한 기준은, 다른 아이가 피해를 입는 순간에는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 질문 앞에 조건 하나가 먼저 옵니다. 지금 다른 사람이 다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머지 세 질문은 묻지 않고 개입합니다. 교육은 그 다음 일입니다.
부모마다 어디서 어디까지 관여하는 게 맞을지는 여전히 고민입니다. 이 글도 답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다만 기준이 있으면 최소한 무엇을 잘못 짚었는지는 나중에 알 수 있습니다. 기준이 없으면 그날 일은 그냥 재수 없었던 날로 끝납니다.
결국은 자리의 문제입니다
관여를 줄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관여의 자리를 옮기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아이 앞에 서서 길을 치우는 자리에서, 아이 뒤에 서서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는 자리로. 같은 양의 사랑이지만 아이가 배우는 것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는 지금 어느 쪽에 서 있을까
관여도는 세 축 중 하나입니다. 아이의 마음을 얼마나 읽는지(인지력), 내 방식이 옳다고 얼마나 확신하는지(자기효능감)와 함께 봐야 내 자리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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